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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된 개인을 통한 세상의 변혁(경건주의 운동 -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

가산(佳杣) 2008. 6. 4. 06:36

변화된 개인을 통한 세상의 변혁(경건주의 운동 -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nmann Francke))

 

평택 대학교 신학전문 대학원

김 문 기 교수

 

* 한국교회는 이미 20년 전에 선교 제2세기 맞이하였으며, 이제 새로운 천 년대를 맞이하였다. 특히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한국 교회는 이전에 경험했던 획기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을 향수로 간직하면서 앞으로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실례는 동일하다고 할 수 없지만 종교개혁 이후 신앙의 열기가 식어버리고 교리와 교권 논쟁에 빠져 있었던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중반의 독일 루터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신앙의 개혁과 부흥운동으로 17세기 독일에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내면적 변화를 요청하였다. 이 내면적 변화는 중생(regeneration)에서 시작하여 성화(sanctification)를 목표로 하였다.

 

* 17세기에 일어났던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독일 경건주의의 아버지인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신앙이 침체해진 독일루터교회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슈페너의 제자이며 그의 친구이기도 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nmann Francke, 1663-1727)이다. 특히 프랑케가 사역했던 할레를 중심으로 진행된 경건주의 운동에는 교육․봉사․선교가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그 모범을 기독교 역사에 남겨주었다.

 

I.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의 생애(할레의 사역 이전까지)

* 1663년 3월 22일 법률가의 아들로 뤼벡(Lübeck) 출생.

* 1670년 부친의 사망.

* 유명한 고타 인문계 고등학교(Gothaer Gymnasium) 졸업.

* 16세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교 입학.

*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키일 대학교(Universität Kiel)로 옮김.

* 함부르크에서 오리엔탈 학자인 에드차르두스(Esdras Edzardus, 1629-1708)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움.

* 1685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철학부에서 석사학위 취득(성서에 관한 언어학적이고 성서주석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 취득). 

* 1687년 회심 이전에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97)를 알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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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nmann Francke)

 

* 라이프치히의 루터교 정통주의자의 동의 아래 몰리노스의 몇 개의 글들을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프랑케는 몰리노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겸손의 실천, 참회를 받는 신부를 위한 조언,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상 그리고 의심에 대한 조언의 체험을 배척할 수 없었다).

* 파울 안톤(Paul Anton)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움 필로-비블리쿰’(Collegium philo-biblicum) 조직.

* Collegium philo-biblicum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젊은 석사들의 모임으로 매주 모여 구약과 신약의 한 장을 해석하는데 목적을 둠

  -  학생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불러  모음.

* 1687년 가을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회심 체험.

* 회심 체험 이후 함부르크로 감. 요한 빈클러(Johann Winckler, 1642-1705) 목사가 세운 자선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침. 

* 빈클러의 교육에 대한 자극들은 프랑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침.

* 1689년 1월/2월: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에게서 두 달 동안 지냄.

 

1689년 2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성서 주석 강의. 교리적이고 신학 논쟁적인 강의 시간은 이제 모든 학부의 학생들을 위한 부흥의 시간이 됨.

  수공업자들과 시민들도 청강. 수십 개의 소그룹과 기도 모임이 생겨남. 라이프치히에 있는 목사들과 교수들의 반대.

* 루터교 정통주의자들로부터 “경건주의자”(die Pietisten)라는 별명을 얻음.

* 1690년 라이프치히의 소요: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690년 3월 프랑케에게 모든 성서 주석 강의를 금했지만 이에 응하지 않음.

  샤데(Johann Caspar Schade, 1666-1698)와 프랑케의 친구들은 라이프치히에서 추방 당함.

* 1690년 3월 10일 라이프치히에서 기도 모임 금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료들과 더불어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림.

* 1690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에어푸르트에서 목회 시작.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문답 교육.

* 1691년 10월 14일 반대하는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에어푸르트 떠남.

 

II. 할레(Halle) 경건주의의 특색  

1. 개인의 회심을 강조한 신앙운동

* 1687년 요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여

   함이니라.)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는 중 불확실하고 의심에 빠져 있는 자신의 신앙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확신을 하게 됨.

* 이 체험을 통해  “바로 나의 모든 의심은 사라져 버렸다.”고 고백.

* 무신론적인 회의론자로 만들었던 이성은 다시 신앙에 대한 시녀가 됨.

* 행함이 있는 기독교적인 삶에 근거하여 오랫동안 경건과 학문 사이의 갈등에서 벗어나게 됨.

* 세상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게 됨: 이것은 그에게 “냄새나는 분뇨 웅덩이”.

* 새롭게 얻은 내적인 독립과 확신이 박해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줌.

 

*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글로 프랑케는 이 “내적인 거듭남”을 서술: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 나게 하며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든다.” 경건과 학문 사이의 갈등이 이제 실천적인 기독교에

   근거하여 결정.

 * 프랑케의 뤼네부르크의 회심의 세 가지 특징 (K.Deppermann):

 ① 프랑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루터처럼 죄의 용서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의혹으로부터의 승리.

 ② 의심의 극복은 논리적인 것이 최종방법이 아니라 더 이상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서적인 체험에서 찾은 것이다. 프랑케가 계몽주의의 자연신학에 대한 통로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음은 이것과 확실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연신학은 그에게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③ 신앙의 확신에 대한 체험은 계속되는 삶의 방식에 유효한 결론을 주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봉사는 이제 프랑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성을 위한 학문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 프랑케는 자신의 이러한 회심의 체험을 그가 세운 학교의 학생들에게도 요청.

* 그리스도를 통해 회심하여 변화된 인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2. 사회봉사운동과 기독교 인재양성

* 1691년 말 할레(Halle) 근교에 있는 글라우하(Glaucha)의 성 게오르겐(St. Georgen) 교회의 목사로 부름 받음.

* 글라우하의 시민: 독한 포도주와 火酒생산을 생업, 알콜 중독은 심각한 문제. 다섯 집에 한 집은 술집. 1691년 페스트로 인구의 거의 절반이 죽음.

* 1683년과 1684년 대 화재로 할레의 대부분이 잿더미: 주민들 가운데 심각한 궁핍.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학교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

* 할레 대학교 철학부의 오리엔탈 언어학 교수로 임명.

* 사역의 중심은 대학교가 아니라 목회.

* 슈페너는 경건주의의 이론적인 토대를 만듦.

 

* 프랑케는 이것을 조직하고 실천: 할레(Halle)에 세운 고아원에서 나타남.

*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혁”(die Weltverwerandlung durch Menschenverwandlung, M. Schmidt). - 경건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

* 고아원 현황(1727년: 프랑케의 죽음): 2,234명의 어린이, 그 중에서 순수한고아는 137명.  이 기관의 원래 이름: “글라우하의 기관들”(Glauchasche Anstalten).

* 실제로 이 기관들은 처음부터 굉장한 계획이 아닌 글라우하(Glaucha)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자극에서 시작: 글라우하에는 매주 목요일 가난한 사람들이 문 앞에 와서

  적선을 받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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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Halle)대학교

 

* 1694년 초: 프랑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목사관 문 앞에서 빵을 나누어 갖도록 함.

* 바로 그 때에 이런 만남을 영혼구원과 기독교의 근본지식을 전달하는데 적용해야겠다고 생각. 어느 목요일 그 사람들 전부를, 한편으로 노인들, 또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을 집에 들어오게 한 다음 젊은이들에게 친절히 루터의 교리문답에 대하여 질문하기 시작. 이 때 노인들은 이것을 경청하였다

  - 약 15분이 걸렸고 기도로 마쳤다:그런 다음 음식을 나누었다. 프랑케는 그들에게 앞으로 육의 양식  뿐만 아니라 영의 양식도 주기를 원한다면서 그들을 보냈다.

* 이 때에 프랑케는 기독교 신앙과 윤리에 있어서 전적인 무지가 특히 어린이들에게 있음을 알게됨. 이 어린이들은 수업료가 없어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프랑케는 어린이들이 공립학교를 다닐 수 있게 그들에게 수업료를 주었다. 그들은 이 돈을 받고서 아무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 1695년 고아원의 시작: 프랑케는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이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음을 목격하고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교회의 도움을 요청.

* 방문객이 잦은 목사관의 거실에 두 개의 성구를 붙이고 그 밑에 상자:

*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일 3:17).

*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는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 1695년 부활절에 프랑케는 자신의 공부방 앞의 방에서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학교 시작.

* 1695년 가을: 네 명의 고아들과 함께 고아원을 열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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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Halle)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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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사: 가난한 대학생에게 가난한 어린이들을 매일 두 시간씩 가르치도록 부탁하였고, 그에게 주급으로 6전을 주기로 약속.

  프랑케는 학교의 선생님들과 관리인들을 할레 대학교의 학생들 가운데 뽑음.

* 사범학교설립: 프랑케는 자체적인 사범학교를 만들었고, 이것은 독일에서 최초의 정규적인 교원 교육이 됨.

  1727년 프랑케가 죽은 해에 100 여명의 남선생과 여선생 그리고 여러 종류의 학교에 약 2,000 명의 학생이 있었다.

  학생과 선생의 관계는 매우 좋음. 고아원에는 약 100 명의 학생들이 10명의 교사 밑에 있었다.

1695년 ‘시민학교’(Bürgerschule) 계획 착수

 - 초등학교: 평민 계층을 위해 즉 농민과 수공업자를 위한 교육기관.

 - 라틴어 학교: 지위가 높은 시민 계급의 자녀들의 교육에 기여.

 - 패다고기움 레기움(Pädagogium Regium): 미래의 지배층, 장교, 고위 관리  그리고 騎士領의 영주를 위한 교육 기관.

교육의 목적: “참된 구원”(wahre Gottseligkeit)과 “기독교적인 지혜”(christliche Klugk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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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케는 “기독교적인 지혜”라는 교육 목적과 더불어 그의 시대에 참으로 근대적이었다.

   첫째 규칙은 시간을 선용. 쉴 틈 없는 활동은 고아원과 ‘패다고기움 레기움’에 있는 어린이들의 하루 일과로 결정되었다.

*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재능은 사용.

* 실제적이고 자연과학적인 교육: 수업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프랑케는 박물 표본실을, 더 나아가 천문 관측소, 기계 작업장 그리고 식물원을 만들었다.

  어학 시간에는 자유로운 회화와 신문 읽는 것에 가치를 부여했다. 정해진 영역에서 학생들은 개인의 재능에 따라 그들의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근대적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프랑케의 교육학에 있어서 미래를 가리킨 것이다.

 

* 기관들의 재정 조달: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불안정. 프랑케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지각, 이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확신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큰 어려움에도 하나님께 맡김. 1698년 9월 19일의 윤허에 의해 프랑케의 기관들은 선제후의 직속에 속하게 되었다.

  프랑케는 이 기관들이 가능한 한 근근히 살아가는 기부금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해야함을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교육 기관 뿐만 아니라 인쇄소, 약국, 서점을

  설립하게 되었다. 이 서점에서는 ‘할레 신문’(Hallische Zeitung)이라는 신문도 발간하였다. 이 사업들은 적지 않은 이윤을 남겼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프랑케의 기관들은 자발적인 기부에 의해 유지되었다.

 

* 프랑케의 회고: “고아원은 그 때 있었던 돈이나 모든 비용을 자진해서 맡아 주었을 높은 사람들의 확고한 약속이나 그 외의 어떤 것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세워졌다.”

* 1700년 이후 프랑케의 학교를 졸업생들: 프로이센 제국의 장교들, 고위 관리들. 이들을 통해 프로이센 국민의 기강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프랑케의 학교에서 배운 정직, 성실, 검소한 삶이다. 프랑케의 노동윤리의 영향 아래 많은 경건주의 귀족들이 공장을 세웠고 여기에서 나온 순수한 수익을

  고아원의 재정에 보태주었다. 전적으로 프로이센 제국은 복종하고 직업에 성실하고 사회적인 책임감을 인식하는 국민이 되게 한 할 레 경건주의의 교육에 은혜를 입었다.

 

3. 해외 선교

* 할레 경건주의: 덴마크와의 관계에서 해외선교 개척. 할레 경건주의가 기독교에 끼친 가장 위대한 업적.

* 덴마크 국왕인 프리드리히 4세(Friedrich IV.)는 덴마크 식민지의 원주민에 대한 선교를 원함.

* 덴마크에서는 선교사로 파송 할만한 목회자를 찾을 수 없었음.

* 1705년 뤼트켄스(Franz Julius Lütkens, 덴마크 궁정 설교자이며 과거에 베를린의 감독교구장)는 베를린에 있는 자기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함. 그는 경건주의적인

  목회자를 전혀 생각하지 못함. 그는 베를린에 있을 때 할레에 비판적인 루터교 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7-1746)와 치겐발크(Bartholomäus Ziegenbalg, 1683-1719)가 추천됨. 이들은 베를린에서 랑에(Joachim Lange)의 제자이며

   할레에서 신학을 공부함.

* 치겐발크: 작센의 풀스니츠(Pulsnitz) 출신이었다. 어린 학생이었을 때 회심을 체험. 슈페너와 프랑케와 교제를 나눔. 프랑케는 그를 메르제부르크와 에어푸르트에

   교사 자리를 주선해주었고, 그는 1705년 다시 베를린에서 살았다. 선교사로의 부름은 그에게 먼저 숙고를 하게 해주었고 그리고 이 부름에 응할 결심을 하였다.

* 1706년 7월:   두 명의 선교사들은 남인도의 트란케바에 도착.

 

* 이들을 시작으로 할레는 그 당시 프로테스탄트 세계에서 최초로 해외 선교를 시작하는 곳이 되었고, 해외 선교사를 길러내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 윌리암 케리(1761-1834) 1793년 6월 13일 인도를 향하여 선교 출발 5개월 후에 도착

* 할레에서 성취된 경건주의와 선교의 연결은 결코 중단될 수 없었다. 여기에서 경건주의는 새롭고 넓은 활동 영역을 발견했다. 여기에 경건주의는 인적으로 물적으로

  강력하게 참여했고 단지 주지만은 안았다. 바로 선교 사역으로부터 그리고 그 사역 안에서 계속하여 새로운 힘과 용기가 경건주의를 자라게 했다.

 

* 프랑케의 지도 아래서 할레 경건주의는 세상에 대한 실천적이고 행동적인 경건을 보여 준 것이다.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서 매우 많은 자극들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혁”, 이것이 할레 경건주의의 목적이었다.

* 할레의 경건주의 운동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인재 양성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케는 할레에 세운 교육 기관을 통해 당시 기독교 세계에서 요청하고 있는 인재를

  프로이센 제국과 전 세계에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할레가 헨델의 고향으로서가 아닌 17세기와 18세기 경건주의 요람으로 더 중요한 의미를 교회사에 남기게 되었다.

 

*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에 시작되어 이미 역사의 창고에 쌓여 있는 운동이 아니다. 경건주의는 19세기에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고, 이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건주의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 교회가 신앙과 행위의 일치를

  주장한 경건주의적인 신앙과 삶을 한국 교회와 사회에 분명 뿌리를 내리고, 이 겨레와 나라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을 배출하는 도구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